"흰머리는 어떤가? 이건 스타일이 될 만한 근거 자체가 없다. 그 자체가○○일 뿐이다. 삶은 그 자체가○○이다.
스타일 이전의 것이다. 삶은 스타일에서 스타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서 ○○로 이어진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머리가 자연스레 희어지는 것일 뿐이요, 그건 본인이 원하건 아니건 상관없이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다. 삶의 흐름 속에서 흰머리로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저 웃으며 새로운 날을 맞이할 뿐이다.
그것이 삶에 대한 겸손한 태도일 것이다. 삶이 나에게 어떤 상황을 안기더라도 그것에 치여 휘청거리거나 흐트러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며 신비롭게 바라보는 것 말이다.
그런데 만약 나이가 들어서 생기는 흰머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감추려 하거나 억지로 연출해서 스타일화한다면 그건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행위이거나 가식에 불과하다.
늙어가는 것 자체는 비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숭고하고 우아하다. 본질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 사실을 부정하고 거부한다든가, 자연스레 생기는 흰머리를 스타일화해서 또 다른 특별함으로 삼으려 한다면, 늙어가는 것이 결코 아름답지 못한 것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삶은 아름답다. 그것이 어린아이의 것이든 늙은이의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동등하게 귀하고 동등하게 아름답다.
오히려 나이든 사람의 경험이 삶의 아름다움을 더욱 절실하게 한다. 또한 그 아름다움을 마침내 절실히 알아차리게 된다. 삶의 ○○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고, 아무런 것도 덧붙이지 않은 ○○의 소중함을 마침내 알게 되는 것이다.
길가에 핀 들꽃 한 송이든, 하늘을 나는 한 무리 까마귀 떼든, 솔잎 사이를 스치는 겨울 바람이든
어느 것도 스타일이 아니다. 그냥 그것이다. 삶이라는 시공간 안에 들어와 있는 ○○일 뿐이다. 인간인 나도 그렇고, 벌레도 그렇고, 나무도 그렇다. 벚꽃은 ‘벚꽃 스타일’을 따로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벚꽃은 그냥 벚꽃일 뿐이며, 벚꽃으로서의 ○○을 최대한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진달래도 마찬가지다. 이른 봄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숲속에서 혼자 발갛게 피어오르며 ‘진달래 스타일’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존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진달래는 진달래 스타일을 모른다. 내가 나의 스타일을 모르는 것같이 그냥 그렇다. 그게 ○○이다." ― 문숙, 《위대한 일은 없다》 중에서